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701550
“패닉과 광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최대한의 지식을 동원해 좇고 상상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는 대단한 분량이 쓰여졌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특정 시점마다 엄청난 금액의 멍청한 돈이 부지기수의 멍청한 사람들 손에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당면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명분을 이유 삼아 이런 사람들의 돈-우리는 이 돈을 눈먼 돈(blind capital)이라고 부른다-이 주기적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불어나고 꿈틀대는 욕망에 주체를 못한다. 이 돈은 누군가가 자신을 집어 삼켜 주기를 갈망하며 ‘흘러 넘친다’; 흘러 넘치는 돈이 누군가를 찾아내면 ‘투기’가 벌어지고; 투기가 이 돈을 다 먹어 치우고 나면 ‘패닉’이 발생한다.”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19세기에 반복해서 벌어지던 금융위기에 대한 연구기록을 남겼는데, 그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19세기의 기록이건만 이 글을 읽어보면 그때나 21세기인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똑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 사이에도 한결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지만 단어를 만들어내는 착상이 동서양 사이에 거의 같은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이 같으니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그때마다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윗 글에서도 똑같이 눈먼 돈(blind capital)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주의한 돈, 헤픈 돈, 정신없는 돈이라고 달리 부를 수도 있을텐데 다른 단어가 아니라 똑같이 ‘눈먼(blind)’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눈먼 돈의 소유자들에 대한 언급에서도 착상의 유사함을 또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 눈먼 돈의 소유자를 언급할 때 상투적으로 ‘귀부인과 성직자(ladies and clergymen)’가 등장했던 모양입니다.
미국에서는 ‘미망인과 고아(widows and orphans)’를 언급했다고 하네요.
우리의 경우는 ‘애를 들쳐업은 엄마와 스님’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증시가 꼭대기였을 때 언론에서 객장 풍경을 묘사할 때면 항상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다 HTS가 많이 보급되면서 지금은 객장 풍경이 좀 달라졌지요.
네덜란드에서도 비슷하게 목사, 미망인, 고아, 퇴역군인 등이 언급되곤 하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추가로 언급되는 존재가 눈에 띄는데 ‘노처녀’가 추가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부유한 노처녀’라고 좀 더 특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요즘말로 하면 ‘골드미스’가 될 듯 합니다.
(이상은 모두 킨들버거의 광기, 패닉, 붕괴 – 금융위기의 역사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이 눈먼 돈의 소유주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킨들버거가 계속해서 소개하는 배젓의 말에 나옵니다.
“광란이다. 이보다 온화한 말로 이 사태를 부를 수 없다. 상업적 관심에서 시작된 광란이 찢어지게 가난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왔다. 이들은 이에 휩쓸리다가 가장 심하게 털린 사람들이다. …점원과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비천한 하인들까지 늙고 병들었을 때를 대비해 모으고 있던 작은 돈을 투자했고…
…망상에 봉이 되어 준 가엾은 이들은 모아 둔 작은 돈을 잃고 구호금으로 연명했다.”
저는 전에 베어마켓 랠리에 관한 글을 쓰면서 당시 주식을 매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개인’은 순수한 ‘개인’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개인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용잔고가 늘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 보면서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윗 구절들이 생각나서 옮겨적어봤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투기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빠져드는 교란적 투기행위는, 복권을 살 때처럼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참여하는 것이고, 이는 사람들에게 효용을 주는 도박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기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냉소적인 견해가 존재합니다.
“정직한 사람을 사기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사기의 피해자들이 비난해야 할 주된 대상은 사기범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라고 합니다.
어떤 정신병리학자들은 사기범과 그의 피해자들은 서로에게 만족을 주는 공생적인 애증의 관계 형성 속에 같이 묶여 있다고 믿는다는 군요.
“세상은 속아 넘어가기를 원한다. 그러니 속도록 내버려 두라”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현대문명은 문명의 속성상 개인을 무기력한 상태로 몰아넣는다고 합니다. 존재 자체의 무력감에 빠진 현대문명 속의 개인들은 결국 합법적인 도박판이 필요한 것일까요? 도박판에서라도 스릴을 맛보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서?
결국 판돈을 더 털리고 나서야 스스로를 자책하며 일터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수년 동안 근면하게 일해서 다시 걸 수 있는 판돈을 마련하기 위해?
너무 냉소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요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말 스스로 속임을 당하기를 원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장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누군가가 자신을 집어 삼켜 주기를 갈망하는 돈들이 많아 보입니다. 배젓의 말대로, 투기가 이 돈을 다 먹어 치우고 나야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이전 글에서 현재 우리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세력은 단순한 헤지펀드 정도가 아닌 매우 큰 세력일 것이라는 견해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들이 아주 큰 세력이니 좀 다를 줄 알았습니다. 세계 시장 차원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 한국주식시장에서 굳이 개미투자자들의 돈까지 빨아들이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결국 현물주식까지도 모두 개미들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습니다. 너무 한다 싶어 화가 나기도 하는데, 한편으로 보면 누구를 탓하랴 싶기도 합니다.
역시 킨들버거 책에 수록되어 있는 애덤 스미스의 말을 소개해드립니다.
“역사의 기록을 점검하고, 또 당신 자신이 경험한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사적인 삶이나 공적인 경력에서 대단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 거의 모두-그들에 대해 당신이 읽었거나 전해 들은 내용이 있을 수도 있고,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주의깊게 생각해 보라; 그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겪은 불행은 형편이 좋았을 때, 다시 말해 가만히 앉아 자족했더라면 그저 좋았던 때를 그들이 몰랐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한동안 글을 쉬었습니다. 이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해서 앞으로는 1주일에 두 편 정도를 목표로 해서 써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 이어나가던 글을 마무리짓지 못했습니다만 그 글의 마무리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앞으로 왜 불황( -> 경제위기 -> 공황)이 생겨나는지에 관한 경제이론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이론들에 근거해서 현재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동안 경제지표를 따져보는 것은 반복했기 때문에 다른 각도에서 현재의 상황을 짚어보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최근 들어 의견을 바꾸었다고 볼 수도 있는 대가들의 견해에 대해 분석해보려 합니다. 루비니, 소로스, 크루그먼 등
저의 글을 성원해주시고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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